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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데라의 정문으로 산겐잇코(삼간일호), 히와다부키로몬(누문 )입니다. 원래 시가현 고난시 조라쿠지 절의 문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후시미 성으로 옮겼다가 게이초 6년(1601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이데라에 기진했습니다.
호토쿠 4년(1452년)에 건축되었는데 가에루마타의 조각과 구미모노라는 두공이 무로마치시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문 양쪽에는 고쇼 3년(1457년)에 제작된 곤고리키시상(금강역사상)이 안치돼 있어 1300여 년의 역사를 갖는 정찰의 정문에 걸맞는 풍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산겐잇코”

산겐잇코

“히와다부키”

히와다부키

노송 나무 껍질을 벗겨 노송 껍질을 대나무 못으로 박아 만드는 공법으로 엮은 지붕.

“로몬(누문 )”

로몬(누문 )

이층 구조의 입구 문으로 1 층에는 지붕이 없이 고시구미 양식으로 가장자리가 난간으로 둘러지고 위층에만 지붕이 있는 문.

“조라쿠지”

고난시 니시테라에 있는 천태종의 고찰. 오미사이고쿠 지방 영지 첫 번째 찰소. 일반적으로 '니시테라'로 불린다. 나라 시대에 승려 료벤이 건립해 '아보시야마고센보'의 중심으로 성황했다고 전해진다. 비불 천수관음 좌상을 모시는 본당과 삼중탑은 국보로 지정되는 등 많은 문화재를 전하고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덴쇼 10 년 (1582)의 혼노지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일찌감치 후계자로 나서 적대 세력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했다. 덴쇼 11 년 (1583)부터 패권을 과시하기 위해 5층 8중의 천수각이 딸린 오사카성 건축에 착수했다. 호타이코로 불리던 그의 시대는 다도와 가노파의 회화로 대표되는 호화로운 모모야마 문화가 개화했다.
미이데라와의 관계는 대체로 양호했지만 말년, 분로쿠 4 년 (1595), 갑자기 사찰 몰수령을 내렸다. 미이데라는 게이초 3 년 (1598) 8 월 그의 사망 이후 히데요시의 정실 기타노만도코로가 재흥했다.

“후시미 성”

교토 시 후시미 구 히가시후시미 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분로쿠 1 년 (1592 년)부터 지은 성. 1596 년 지진으로 붕괴한 후 고하타 산으로 옮겨 재건하여 교토의 관문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에도 막부가 폐기, 그 유구는 다이토쿠지 · 니시혼간지 · 도요쿠니 신사로 옮겨 현존.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초대 쇼군 (재직 1603-1605).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소속된 후 오다 노부나가와 인연을 맺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좋은 사이가 되었다. 1590 년 (덴쇼 18) 관동 8 국에 봉쇄되어 에도 성에 들어가 히데요시 사후 후시미 성에서 집정했다. 1600 년 (게이쵸 5)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를 물리치고 1603 년 세이 다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다. 쇼군직을 히데타다에 물려준 후 은퇴한 거장에게 칭하는 오고쇼로 불렸다. 07 년 슨푸에 은거 후에도 중요한 정무를 스스로 정하고,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씨를 멸하여 막부 260 여년의 기초를 확립했다. 시호, 도쇼다이곤겐. (1542-1616)

“가에루마타”

가에루마타

두 개의 수평재를 사이에 두고, 개구리가 가랑이를 벌린 것과 같은 곡선 모양으로 좌우 양쪽 아래가 별려진 구조물. 또한 철촉 모양의 칼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카리마타 (쌍 칼창)에서 전해진 것이라고도 한다.

“구미모노”

구미모노

주로 기둥에 마스(두)와 히지키(공)를 조합하여 처마 서까래를 받치는 가교를 지지하는 구조. 도쿄(斗栱), 마스쿠미(斗組)라고도 한다.

“곤고리키시상(금강역사상)”

곤고리키시상(금강역사상)
무로마치시대(호우도쿠 4년 1452)